고구려(高句麗)는 한국의 고대 왕조국가 중 하나이다.[6] 국성은 고씨(高氏)이다.[7] 본래의 국호는 고구려였으나 당시의 금석문과 역사 기록을 토대로 장수왕대에 고려(高麗)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8][9][10][11]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기원전 37년 부여의 주몽이 졸본 지역에 나라를 건립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고구려는 이후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를 정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후한, 위, 후연 등 중국 여러 왕조와 말갈, 동예, 옥저 등 주변국들과 전쟁을 치렀다. 동천왕 시기 수도인 국내성이 위나라에 함락되기도 하고, 이후 고국원왕 때 다시 수도가 함락되고 고국원왕은 백제의 대외정복 전쟁 중 평양성에서 전사하는 등 3세기에서 4세기 사이 고구려의 국력은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소수림왕 시기에 내치[12]를 다짐으로써 국력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한다. 5세기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수도를 국내성에서 지금의 평양성으로 옮겼고, 5세기 후반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b]를 함락하고 백제, 가야, 신라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시기 고구려는 오늘날 평안도, 랴오닝성, 지린성을 주무대로 삼으며 한반도 중부와 남부, 만주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았다. 6세기부터 정치적 불안정과 주변 국가들의 성장으로 쇠퇴하였고, 7세기 수나라 및 당나라와 전쟁을 겪으면서 국력이 더욱 쇠퇴했다. 668년 정치 세력의 내분과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고구려 문화는 한민족 전통문화의 뿌리 중 하나로, 각저총[13]의 씨름도에 근거해 전통스포츠 씨름의 기원이 된 시대로 추정되고 있다.[14] 또한 난방 방식인 온돌[15], 현악기 거문고의 기원으로도 여겨진다.[16] 한반도 남부와 풍습과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존재한다.[17][18] 국호 동명성왕 및 충주 고구려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국호를 '고구려'라 명명하였으나 5세기 장수왕대에 국호를 '고려'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9][20] 이후 이름 '고려'는 보덕국[21]과 대조영의 발해에서 국호로 사용하기도 했다.[22]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되어 맥을 이었다. 같은 이름의 왕조와의 시대 구분에 관해선 왕씨의 고려대에는 이 왕조를 '전에 있던 고려'라는 뜻의 구고려(句高麗)[23]라 불렀으며 신라국석남산고국사비명후기[24]를 통해 자신들을 '후에 이어진 고려'라는 뜻의 후고려(後高麗)라 칭해 구분하였다.[25]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이 왕조를 4세기까지의 국호인 '고구려'로 표기하며 왕씨가 세운 고려와 구분하였다. 발음에 관해서는 나라 이름 '고구려'의 한국어 독음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라는 의견이 있다.[26] 이는 麗의 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발음된다는 음운 법칙에서 비롯되었다.[27][28][29][30] 그러나 조선시대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라 나타나고[31]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32]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33][34][35]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중원왕조들은 고구려를 예(濊)/맥(貊)/고리(槀離)/구리(句麗)/평양(平凉)/요동(遼東) 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36] 역사 졸본부여의 탄생 (기원전 58년-서기 13년) 이 부분의 본문은 동명성왕입니다. 시조 고주몽(高朱蒙)의 원래 이름은 해주몽(解朱蒙)으로 출생은 기원전 58년이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예맥족의 국가 부여의 일부였던 북부여의 왕 해모수의 아들이다.[37]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이면서 동시에 부여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천제의 아들이라 불렸다.[38] 외조부는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이며 그의 세 딸 하유화(河柳花)·하훤화(河萱花)·하위화(河葦花)중 하유화가 그의 어머니이다.[39] 이름인 주몽(朱蒙)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신궁(神弓)이라는 뜻이다.[40] 어릴 때부터 활로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재능을 타고 났다 전해진다.[41] 당시 해부루(解夫婁)의 뒤를 이어 부여의 2대 왕이었던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다 전해진다. 일곱 아들중 태자였던 해대소(解帶素, 대소왕)를 주축으로 6명의 형제는 주몽의 재능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42] 평양의 동명성왕 석상. 이에 주몽은 협보(陜父), 오이(烏伊)[43], 마리(摩離)[44]와 함께 부여를 나와 남하하였다.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이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감응한 자라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하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일컫는다.[45] 해주몽은 배다른 친구 세명과 함께 남하하여 졸본(卒本)에 정착하였다. 그곳의 세력가 연타발의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하였다. 이후 비류국의 군장 송양(松讓)을 만났다. 해주몽은 송양을 포섭하기 위해 그와 활싸움을 신청했고 송양이 옥가락지를 백보 밖의 표적으로 놓자 기왓장 부서지듯 백발백중하였다고 한다.[46] 이에 기원전 36년 송양은 주몽에게 투항하였다.[47]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중 오녀산성(五女山城, 환런현)을 도읍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왕실의 이름을 해씨(解)에서 고씨(高)로 변경해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이며 대관식에서 고구려의 1대 왕 추모성왕(東明聖王)이 되었다.[48] 추모성왕(東明聖王)은 즉위한 후 송양의 나라였던 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라 바꾸고 그를 그곳의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또한 추모성왕은 가장 먼저 근방의 말갈족을 복속시켰다.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였으며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49]를 보내 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扶尉猒)[50]을 보내 북옥저(北沃沮)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부여에 남아있던 어머니 하유화가 죽었다. 한편 추모성왕의 전 소생 왕후 예씨(禮氏)의 아들 해유리(解瑠璃)는 기원전 37년 부여에서 태어났다. 해유리는 어머니 예씨의 말을 듣고 추모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이라는 징표를 주춧돌에서 찾아내 기원전 19년 해유리는 고구려로 찾아가 추모성왕을 만나 성을 개칭해 고유리(高瑠璃)가 되어 그해 음력 4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1년후인 기원전 18년 소서노는 온조(溫祚), 비류(沸流) 등 자식 2명과 함께 기원전 18년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인천광역시)에 정착하였으며 온조는 위례성(慰禮城, 서울특별시)에 정착하였다. 이때 온조를 따라 고구려 졸본에서 위례성으로 남하한 열명의 개국공신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개국공신 10명은 마려(馬藜), 오간(烏干),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범창(笵昌), 조성(趙成)이며 이중 마려는 개국공신 마리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한국 마(馬)씨의 조상이 되었다. 해루는 해모수와 같은 집안사람으로 추정된다. 조성은 직산 조씨의 조상이며 알려지지 않은 공신 중 전섭(全聶)은 한국 전(全)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고유리는 동명성왕이 기원전 19년이 서거하자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명왕(瑠璃明王)이 되었다. 기원전 18년 음력 7월에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기원전 9년에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부분노(扶芬奴)의 계책을 사용해서 토벌하였다. 기원전 6년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명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왕은 기원전 6년 음력 11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유리명왕은 부여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3년 압록강 근처의 국내성(國內城, 집안)으로 도읍을 천도하였다. 9년 음력 8월,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부여를 섬길 것을 종용하였는데 유리명왕은 국력이 부족한 것을 알고 부여에 신속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왕자 고무휼(高無恤, 대무신왕)이 사신에게 부여의 내정이나 잘 다스리라는 의미의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사신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12년에 전한을 무너트리고 신나라을 세운 왕망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군을 징발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장수를 보내 공격하여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죽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나라를 공격하였다. 13년에는 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무휼이 매복 작전을 써서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유리명왕은 14년에는 양맥(梁貊)을 정복하고 현도군(玄菟郡)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지배하였다. 조위와의 전쟁 (13년-270년) 이 부분의 본문은 고구려-위 전쟁, 원삼국시대 및 한사군입니다. 3대 왕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4년~44년)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22년 음력 2월 장수인 괴유가 부여 대소왕을 죽였다. 왕을 잃은 부여는 분열되어 대소의 동생은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으며 음력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백성 1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해 사실상 부여를 흡수하였다. 26년 음력 10월 개마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음력 12월에는 구다국이 항복하였다. 28년 음력 7월에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고구려가 수성전으로 버티자 철수하였다. 32년에는 낙랑국을 정벌하여 지배했다. 37년에도 낙랑을 정벌하여 병합한 기사가 있는데, 이를 32년 낙랑 정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독립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51] 하지만 사실상 낙랑군은 한반도인을 수장으로 삼고 고구려, 백제에 굴복한 뜻으로 공물을 바치는 등 고구려의 입장에서 긴 시간동안 한사군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군은 한사군을 정복하여 지배해 한사군민들은 전멸하였다. 고구려는 이후 별다른 큰 족적없이 나라를 유지해오다 6대 왕이 된 태조대왕(太祖大王)대에 들어 다시 정복활동을 재게하였다. 태조대왕은 2대 왕 유리명왕의 손자로, 56년에는 동옥저(東沃沮)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남으로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 68년에는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70년에는 관나부(貫那部) 조나(藻那)를 병합하였다. 72년에는 주나(朱那)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한편 후한과의 대외 관계에서는 평화적인 외교와 적극적인 공세를 함께 펼쳤다. 105년에는 요동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였고, 왕은 자신의 동생 또는 서자인 수성(遂成)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군·현도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遼隧縣)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후한과 협공을 펼쳐, 고구려군이 크게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태조대왕은 요동의 신안(新安)·거향(居鄕)을 약탈하였다.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도 공략하여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이후 태조대왕의 자식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다가 명림답부(明臨答夫)가 165년 제7대왕 차대왕을 죽이고 제8대왕 신대왕을 옹립하였다. 신대왕은 166년 명림답부를 재상직에 해당하는 국상에 임명하였다. 172년, 한나라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신대왕이 이를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농성할 것인지 명림답부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명림답부는 청야전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결국 한의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였고, 이에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뒤를 이은 제9대왕 고국천왕(故國川王)은 191년 평민 출신의 을파소(乙巴素)를 제2대 국상에 임명하였다. 194년에는 사회보장제도인 진대법(賑貸法)을 제정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후에 고려의 의창과 조선의 환곡에 영향을 주었다. 고국천왕의 부인이었던 왕후 우씨는 다시 그 아들인 10대왕 산상왕의 부인이 되어 권력을 휘어잡았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던 것이었다. 198년에 환도성(丸都城, 집안)을 쌓았고 203년에는 2대 국상 을파소가 죽어 고우루(高優婁)를 3대 국상으로 삼았다. 209년에는 도읍을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217년에는 후한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위의 조조군에 쫓겨 1천여 가를 데리고 투항하였으며, 고국천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원의 삼국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제11대 왕 동천왕은 227년 왕위에 올라 동오의 손권과 관계를 맺고, 234년에는 위나라의 조예와 화친하였다. 이에 236년에는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를 처형해 목을 위에 보내 관계를 돈독히해 동맹국이 되었다. 위나라 3대 황제 조예는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기 위해 관구검(毌丘儉)을 유주 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공손연은 손권과 손을 잡고 협력하였다. 238년 봄, 위에서는 태위 사마의가 우금, 호준 등을 거느리고 보병과 기병 4만 명으로 공손연 토벌에 나섰다. 사마의는 요동으로 진군하면서 우북평으로 물러나 주둔하던 관구검의 군대를 휘하에 편입하고 동맹 관계인 고구려[52]에 사자를 파견해 공손연을 양쪽에서 협공하도록 원병을 요청하자 동천왕은 고구려의 주부와 대가들을 보내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공손연을 협공하게 한 일변, 공손연은 비연(卑衍)을 대장으로 삼아 양조(楊祚)과 함께 요수에 주둔시켜 20여 리에 걸쳐 구덩이와 책등을 둘러쳐 위군의 내습에 방비한 일변, 요동군은 요수에 의지해 위나라군에 저항하자 사마의의 위군은 남으로 도강하려는 체하고 실은 북으로 도강해 연의 도읍 양평으로 곧바로 향했다. 공손연의 세력은 결국 망하여 요동은 위나라에 흡수되었다.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의 고대 왕조국가 중 하나이다.[6] 국성은 고씨(高氏)이다.[7] 본래의 국호는 고구려였으나 당시의 금석문과 역사 기록을 토대로 장수왕대에 고려(高麗)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8][9][10][11]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기원전 37년 부여의 주몽이 졸본 지역에 나라를 건립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고구려는 이후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를 정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후한, 위, 후연 등 중국 여러 왕조와 말갈, 동예, 옥저 등 주변국들과 전쟁을 치렀다. 동천왕 시기 수도인 국내성이 위나라에 함락되기도 하고, 이후 고국원왕 때 다시 수도가 함락되고 고국원왕은 백제의 대외정복 전쟁 중 평양성에서 전사하는 등 3세기에서 4세기 사이 고구려의 국력은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소수림왕 시기에 내치[12]를 다짐으로써 국력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한다. 5세기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수도를 국내성에서 지금의 평양성으로 옮겼고, 5세기 후반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b]를 함락하고 백제, 가야, 신라를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시기 고구려는 오늘날 평안도, 랴오닝성, 지린성을 주무대로 삼으며 한반도 중부와 남부, 만주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았다. 6세기부터 정치적 불안정과 주변 국가들의 성장으로 쇠퇴하였고, 7세기 수나라 및 당나라와 전쟁을 겪으면서 국력이 더욱 쇠퇴했다. 668년 정치 세력의 내분과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고구려 문화는 한민족 전통문화의 뿌리 중 하나로, 각저총[13]의 씨름도에 근거해 전통스포츠 씨름의 기원이 된 시대로 추정되고 있다.[14] 또한 난방 방식인 온돌[15], 현악기 거문고의 기원으로도 여겨진다.[16] 한반도 남부와 풍습과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존재한다.[17][18]
국호
[편집]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국호를 '고구려'라 명명하였으나 5세기 장수왕대에 국호를 '고려'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9][20] 이후 이름 '고려'는 보덕국[21]과 대조영의 발해에서 국호로 사용하기도 했다.[22]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되어 맥을 이었다.
같은 이름의 왕조와의 시대 구분에 관해선 왕씨의 고려대에는 이 왕조를 '전에 있던 고려'라는 뜻의 구고려(句高麗)[23]라 불렀으며 신라국석남산고국사비명후기[24]를 통해 자신들을 '후에 이어진 고려'라는 뜻의 후고려(後高麗)라 칭해 구분하였다.[25]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이 왕조를 4세기까지의 국호인 '고구려'로 표기하며 왕씨가 세운 고려와 구분하였다.
발음에 관해서는 나라 이름 '고구려'의 한국어 독음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라는 의견이 있다.[26] 이는 麗의 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발음된다는 음운 법칙에서 비롯되었다.[27][28][29][30] 그러나 조선시대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라 나타나고[31]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32]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33][34][35]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중원왕조들은 고구려를 예(濊)/맥(貊)/고리(槀離)/구리(句麗)/평양(平凉)/요동(遼東) 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36]
역사
[편집]졸본부여의 탄생 (기원전 58년-서기 13년)
[편집]시조 고주몽(高朱蒙)의 원래 이름은 해주몽(解朱蒙)으로 출생은 기원전 58년이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예맥족의 국가 부여의 일부였던 북부여의 왕 해모수의 아들이다.[37]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이면서 동시에 부여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천제의 아들이라 불렸다.[38] 외조부는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이며 그의 세 딸 하유화(河柳花)·하훤화(河萱花)·하위화(河葦花)중 하유화가 그의 어머니이다.[39]
이름인 주몽(朱蒙)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신궁(神弓)이라는 뜻이다.[40] 어릴 때부터 활로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재능을 타고 났다 전해진다.[41]
당시 해부루(解夫婁)의 뒤를 이어 부여의 2대 왕이었던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다 전해진다. 일곱 아들중 태자였던 해대소(解帶素, 대소왕)를 주축으로 6명의 형제는 주몽의 재능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42]

이에 주몽은 협보(陜父), 오이(烏伊)[43], 마리(摩離)[44]와 함께 부여를 나와 남하하였다.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이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이에 감응한 자라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하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魚鼈成橋)라 일컫는다.[45]
해주몽은 배다른 친구 세명과 함께 남하하여 졸본(卒本)에 정착하였다. 그곳의 세력가 연타발의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하였다. 이후 비류국의 군장 송양(松讓)을 만났다. 해주몽은 송양을 포섭하기 위해 그와 활싸움을 신청했고 송양이 옥가락지를 백보 밖의 표적으로 놓자 기왓장 부서지듯 백발백중하였다고 한다.[46] 이에 기원전 36년 송양은 주몽에게 투항하였다.[47]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중 오녀산성(五女山城, 환런현)을 도읍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왕실의 이름을 해씨(解)에서 고씨(高)로 변경해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이며 대관식에서 고구려의 1대 왕 추모성왕(東明聖王)이 되었다.[48] 추모성왕(東明聖王)은 즉위한 후 송양의 나라였던 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라 바꾸고 그를 그곳의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또한 추모성왕은 가장 먼저 근방의 말갈족을 복속시켰다.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였으며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49]를 보내 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扶尉猒)[50]을 보내 북옥저(北沃沮)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부여에 남아있던 어머니 하유화가 죽었다.
한편 추모성왕의 전 소생 왕후 예씨(禮氏)의 아들 해유리(解瑠璃)는 기원전 37년 부여에서 태어났다. 해유리는 어머니 예씨의 말을 듣고 추모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이라는 징표를 주춧돌에서 찾아내 기원전 19년 해유리는 고구려로 찾아가 추모성왕을 만나 성을 개칭해 고유리(高瑠璃)가 되어 그해 음력 4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1년후인 기원전 18년 소서노는 온조(溫祚), 비류(沸流) 등 자식 2명과 함께 기원전 18년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인천광역시)에 정착하였으며 온조는 위례성(慰禮城, 서울특별시)에 정착하였다. 이때 온조를 따라 고구려 졸본에서 위례성으로 남하한 열명의 개국공신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개국공신 10명은 마려(馬藜), 오간(烏干),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범창(笵昌), 조성(趙成)이며 이중 마려는 개국공신 마리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한국 마(馬)씨의 조상이 되었다. 해루는 해모수와 같은 집안사람으로 추정된다. 조성은 직산 조씨의 조상이며 알려지지 않은 공신 중 전섭(全聶)은 한국 전(全)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고유리는 동명성왕이 기원전 19년이 서거하자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명왕(瑠璃明王)이 되었다. 기원전 18년 음력 7월에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기원전 9년에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부분노(扶芬奴)의 계책을 사용해서 토벌하였다. 기원전 6년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명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왕은 기원전 6년 음력 11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유리명왕은 부여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3년 압록강 근처의 국내성(國內城, 집안)으로 도읍을 천도하였다.
9년 음력 8월,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부여를 섬길 것을 종용하였는데 유리명왕은 국력이 부족한 것을 알고 부여에 신속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왕자 고무휼(高無恤, 대무신왕)이 사신에게 부여의 내정이나 잘 다스리라는 의미의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사신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12년에 전한을 무너트리고 신나라을 세운 왕망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군을 징발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장수를 보내 공격하여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죽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나라를 공격하였다. 13년에는 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무휼이 매복 작전을 써서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유리명왕은 14년에는 양맥(梁貊)을 정복하고 현도군(玄菟郡)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지배하였다.
조위와의 전쟁 (13년-270년)
[편집]3대 왕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4년~44년)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22년 음력 2월 장수인 괴유가 부여 대소왕을 죽였다. 왕을 잃은 부여는 분열되어 대소의 동생은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으며 음력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백성 1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해 사실상 부여를 흡수하였다. 26년 음력 10월 개마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음력 12월에는 구다국이 항복하였다. 28년 음력 7월에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고구려가 수성전으로 버티자 철수하였다. 32년에는 낙랑국을 정벌하여 지배했다. 37년에도 낙랑을 정벌하여 병합한 기사가 있는데, 이를 32년 낙랑 정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독립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51] 하지만 사실상 낙랑군은 한반도인을 수장으로 삼고 고구려, 백제에 굴복한 뜻으로 공물을 바치는 등 고구려의 입장에서 긴 시간동안 한사군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군은 한사군을 정복하여 지배해 한사군민들은 전멸하였다.
고구려는 이후 별다른 큰 족적없이 나라를 유지해오다 6대 왕이 된 태조대왕(太祖大王)대에 들어 다시 정복활동을 재게하였다. 태조대왕은 2대 왕 유리명왕의 손자로, 56년에는 동옥저(東沃沮)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남으로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 68년에는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70년에는 관나부(貫那部) 조나(藻那)를 병합하였다. 72년에는 주나(朱那)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한편 후한과의 대외 관계에서는 평화적인 외교와 적극적인 공세를 함께 펼쳤다. 105년에는 요동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였고, 왕은 자신의 동생 또는 서자인 수성(遂成)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군·현도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遼隧縣)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후한과 협공을 펼쳐, 고구려군이 크게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태조대왕은 요동의 신안(新安)·거향(居鄕)을 약탈하였다.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도 공략하여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이후 태조대왕의 자식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다가 명림답부(明臨答夫)가 165년 제7대왕 차대왕을 죽이고 제8대왕 신대왕을 옹립하였다. 신대왕은 166년 명림답부를 재상직에 해당하는 국상에 임명하였다. 172년, 한나라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신대왕이 이를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농성할 것인지 명림답부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명림답부는 청야전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결국 한의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였고, 이에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뒤를 이은 제9대왕 고국천왕(故國川王)은 191년 평민 출신의 을파소(乙巴素)를 제2대 국상에 임명하였다. 194년에는 사회보장제도인 진대법(賑貸法)을 제정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후에 고려의 의창과 조선의 환곡에 영향을 주었다.
고국천왕의 부인이었던 왕후 우씨는 다시 그 아들인 10대왕 산상왕의 부인이 되어 권력을 휘어잡았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던 것이었다. 198년에 환도성(丸都城, 집안)을 쌓았고 203년에는 2대 국상 을파소가 죽어 고우루(高優婁)를 3대 국상으로 삼았다. 209년에는 도읍을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217년에는 후한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위의 조조군에 쫓겨 1천여 가를 데리고 투항하였으며, 고국천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원의 삼국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제11대 왕 동천왕은 227년 왕위에 올라 동오의 손권과 관계를 맺고, 234년에는 위나라의 조예와 화친하였다. 이에 236년에는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를 처형해 목을 위에 보내 관계를 돈독히해 동맹국이 되었다. 위나라 3대 황제 조예는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기 위해 관구검(毌丘儉)을 유주 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공손연은 손권과 손을 잡고 협력하였다. 238년 봄, 위에서는 태위 사마의가 우금, 호준 등을 거느리고 보병과 기병 4만 명으로 공손연 토벌에 나섰다.
사마의는 요동으로 진군하면서 우북평으로 물러나 주둔하던 관구검의 군대를 휘하에 편입하고 동맹 관계인 고구려[52]에 사자를 파견해 공손연을 양쪽에서 협공하도록 원병을 요청하자 동천왕은 고구려의 주부와 대가들을 보내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공손연을 협공하게 한 일변, 공손연은 비연(卑衍)을 대장으로 삼아 양조(楊祚)과 함께 요수에 주둔시켜 20여 리에 걸쳐 구덩이와 책등을 둘러쳐 위군의 내습에 방비한 일변, 요동군은 요수에 의지해 위나라군에 저항하자 사마의의 위군은 남으로 도강하려는 체하고 실은 북으로 도강해 연의 도읍 양평으로 곧바로 향했다. 공손연의 세력은 결국 망하여 요동은 위나라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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